1983년 말, 삼성이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 반도체 업계가 술렁였다. 그런데 그보다 약 9년 앞선 1974년 1월, 경기도 부천에는 이미 웨이퍼 가공을 목표로 한 반도체 공장이 세워지고 있었다. 한국 반도체의 출발점은 삼성의 첫 투자가 아니라 그 앞에 있던 이름들에서 찾아야 한다.
"삼성이 맨땅에서 반도체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절반만 맞다. 삼성이 뛰어든 시점은 1974년 12월이고, 그때 이미 한국에는 외국 자본의 반도체 공장이 여럿 가동 중이었다. 이 글은 삼성 이전의 선행자들이 누구였고, 삼성은 무엇을 이어받았으며, 왜 그 이름들이 대중의 기억에서 흐려졌는지를 사실관계 중심으로 정리한다.
삼성 이전, 한국 땅에 먼저 세워진 반도체 공장들
한국에 반도체 공장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65년이다. 미국 코미(KOMY) 그룹의 투자로 세워진 고미반도체가 그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시그네틱스, 페어차일드, 모토로라, 도시바 같은 미국·일본 기업이 차례로 한국에 진출했다.
외국 기업이 한국을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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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한국 방직공장 생산 라인 출처. 위키미디어 |
핵심 동력은 값싸고 손재주 좋은 노동력이었다. 반도체 후공정(칩을 패키지에 넣어 완제품 형태로 만드는 마무리 공정)은 현미경 아래에서 가는 금선을 하나하나 연결하는 수작업 비중이 컸다. 인건비가 높아진 미국·일본 기업에는 한국이 매력적인 조립 기지였다.
이 단계의 한국은 기술을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조립을 맡는 나라였다. 설계와 웨이퍼 제작은 본사가 하고, 한국 공장은 완성된 웨이퍼를 받아 조립·검사해 되돌려 보냈다. 일자리와 외화를 가져왔지만 핵심 기술은 한국에 남지 않았다.
전공정과 후공정, 무엇이 다른가
부가가치가 갈리는 지점
전공정(실리콘 웨이퍼 위에 회로를 새기는 단계)은 클린룸과 정밀 장비, 공정 노하우가 필요하고 부가가치가 높다. 후공정은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이다. 1970년대 초 한국에 있던 외국계 공장의 상당수는 후공정 중심이었다는 점이 이후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 구분 | 고미반도체 등 초기 외국계 공장 | 한국반도체 |
|---|---|---|
| 시작 시기 | 1965년 고미반도체 설립을 시작으로 외국 기업 진출 | 1974년 1월 설립 |
| 자본 성격 | 미국·일본 기업의 현지 투자 | 한국 측 KEMCO와 미국 현지법인 ICⅡ의 합작 |
| 주된 지향 | 조립 등 후공정 중심 | 웨이퍼 가공(전공정) 생산 지향 |
| 이후 경과 | 본사 전략에 따라 운영 | 1974년 12월 삼성이 지분 50% 인수 |
위 표의 구분은 이해를 돕기 위한 큰 흐름이며, 개별 기업의 세부 사업 범위는 자료에 따라 설명이 다를 수 있다.
한국반도체와 강기동 박사, 전공정 도전의 첫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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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 전경 출처. 미래를보는창 |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웨이퍼 가공 반도체 기업은 1974년 1월 26일 설립된 한국반도체로 기록된다. 창립자는 재미교포 강기동 박사다. 훗날 삼성전자 회장을 지낸 강진구는 자서전에서 반도체의 미개지에 최초의 본격적인 반도체 공장을 세운 것이 강기동 박사의 한국반도체였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립을 넘어 웨이퍼 가공으로
한국반도체의 목표는 조립 기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웨이퍼 가공이라는 고부가가치 공정을 한국 땅에서 하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장비와 인력, 자금이 모두 부족했고, 해외 기술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전공정 공장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낯선 시도였다.
설립자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강기동 박사와 미국 측 투자자가 각각 50만 달러씩, 총 100만 달러를 투자했다고 전해진다. 신생 반도체 공장을 굴리기에는 넉넉하지 않은 규모였다.
준공 직후 닥친 자금난
공장이 준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투자자 한 쪽이 먼저 손을 들었다. 보도에 따르면 준공 두 달 만에 미국인 투자자가 지분을 정리하려는 상황이 됐다. 한국반도체는 파산 위기에 몰렸고, 이 소식이 삼성 내부에 전해지면서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는다.
삼성의 인수, 그리고 결정적 전환점
삼성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기로 한 날짜는 1974년 12월 6일로 알려져 있다. 삼성 공식 자료도 1974년 12월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첫발로 기록한다. 삼성의 반도체 역사는 이 인수에서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건희의 사재 인수
당시 이병철 회장과 그룹 비서실, 삼성전자 임원들은 반도체 같은 첨단 사업이 아직 삼성에는 무리라며 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건희 회장은 이를 무릅쓰고 개인 자금으로 한국반도체의 한국 측 지분 50%를 인수했다. 금액은 50만 달러로 기록한 자료가 여럿 있으나, 자료마다 서술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핵심 요약: 한국 반도체의 시작은 1965년 고미반도체 이후 외국계 공장들로 거슬러 올라가며, 1974년 1월 강기동 박사가 한국반도체를 세웠습니다. 삼성은 그해 12월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인수에서 64K D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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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 공장의 연구원들 예시 |
인수 이후 삼성은 한국반도체를 단계적으로 흡수하며 사업 기반을 다졌다. 이후 1983년 2월 이건희 회장이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 본격 진출 의지를 밝힌 이른바 2.8 도쿄선언이 있었고, 같은 해 말 64K D램 개발로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이후 D램 시장에서 1992년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이 흐름을 보면 삼성 반도체의 성공은 한 사람의 결단과 한 번의 개발이 아니라, 선행자들이 닦아 놓은 공장 터와 인력 위에 장기 투자가 쌓인 결과로 읽힌다.
삼성 신화에 가려진 선행자들, 무엇이 남았나
한국반도체는 이후 삼성의 반도체 조직 안으로 흡수되면서 독립 기업으로서의 이름은 대중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강기동 박사 역시 오랫동안 삼성 반도체 신화의 배경 인물로만 다뤄진 면이 있다. 그러나 선행 기업들이 남긴 것은 단순한 공장 건물이 아니었다.
공정 경험과 인력의 계보
외국계 조립 공장과 한국반도체를 거치며 한국에는 클린룸을 운영하고 웨이퍼를 다뤄본 기술자 세대가 처음으로 생겨났다. 이 경험이 이후 삼성을 포함한 국내 기업의 반도체 인력 풀로 이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다만 개별 인물의 이동 경로는 자료마다 달라 단정하기 어렵다.
지분 약속을 둘러싼 엇갈린 이야기
사실과 주장의 구분: 강기동 박사 측은 1974년 지분 이전 과정에서 양산과 수출을 조건으로 삼성이 지분 10%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약속의 당사자인 이병철·이건희 회장과 강진구 전 회장은 모두 별세했고,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자료는 제한적입니다. 이 글은 이 문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이런 주장이 있었다는 점만 전합니다.
강기동 박사는 1976년 회사를 떠나며 자신의 지분을 요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반도체의 이름이 지워지고 다른 이의 업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그의 호소는 훗날 이건희 회장에게 보낸 편지 등으로 보도되었다. 한 쪽의 증언만으로 전체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반도체사를 볼 때 이 대목을 함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삼성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
삼성 이전에 반도체 공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삼성의 업적을 깎아내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사재로 인수해 D램 세계 1위까지 끌고 간 투자의 지속성이 삼성의 진짜 차별점이었다. 동시에 한국 반도체는 삼성 혼자 시작한 일이 아니라 외국 기업, 재미 기술자, 그리고 현장 노동자가 함께 놓은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는 점도 분명하다.
결국 "누가 처음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을 처음이라 부를 것인가"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첫 공장을 기준으로 하면 1965년 고미반도체, 첫 본격 웨이퍼 가공 기업은 1974년 한국반도체, 첫 대규모 메모리 투자는 삼성이다. 이렇게 층을 나눠 보면 한국 반도체의 출발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


